내지른 것은 크게 소리를 낼 수 없는- 숨소리 가득한 매너모드 비명이였다. 하지만 화재 경보음은 울리지 않았고 퉁 하는 금속 판 소리만 빈 복도에 울려퍼졌다. 소화전 문짝이 열렸다. 이게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볼 겨를도 없이, 율은 소화전 안쪽에 뛰어들어가 나에게 길게 늘어진 소방용 호스의 끝 부분을 던져주었다. 율은 그걸 잡고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기세에 밀려 그대로 소화전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내가 소화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퉁 하는 소리와 함께 소화전 문이 도로 닫혔다.
소화전 안은 너무나 어두워서,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율은 웍 하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의 조명을 켜서, 시덥잖은 귀신 흉내를 냈다. 정말 별 것 아니였지만, 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악에 받혀 나도 휴대폰의 조명을 켜고 웍– 하고 덩달아 흉내를 내주었다. 율은 웃기만 했다. 율이 한 번 웃으니 그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이, 어딘가의 악당 같았다. 음하하, 음하하하하. 저의 비밀 동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오다니, 하찮은 것, 음하하. 그제서야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 율에게 물을 수 있었다. 율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라며, 그 이야기는 떡볶이 먹으면서 하자고 말했다. 이어 호스를 잡고 따라가다 보면 떡볶이를 먹을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조명을 율에게 비춰보니, 허리에 소방용 호스를 동여매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등정을 앞두고 대장님께서 하는 무슨 동기 부여 같은 것인가 싶었다. 가만, 에베레스트 등정? 그건 무서운데. 하기 싫어.
율을 앞에 두고 따라가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라도 해 보기로 했다. 물방울이 머리 위에 떨어졌다. 천장에서 물이 새는 것 같았다. 곧바로 조명을 비춰 천장을 확인해보았다. 놀랍게도 소화전의 내부는 벽, 천장, 바닥 모두 여기저기 주름이 잡힌 유사 동굴 같은 곳이였다. 아니, 정말 동굴인가? 벽에 한쪽 손을 대 보았다. 물기가 있었다. 바닥도 만져보았다. 바닥도 물청소를 갓 끝낸 복도 정도의 물기가 있었다. 학교에 이런 곳이 있다고? 무슨 학교를 암벽을 파서 만들었나? 우리 학교가 어디어디 영화에 나오고 무슨무슨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학교 건물 근처에 산이 있기는 했지만 분명 아예 붙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이런 모양새를 가진 동굴이 여기 있는게 가능하기는 한가? 내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가만히 앉아있었던 탓에, 율이 혼자 저 앞을 걸어가다 팽팽해진 호스 줄에 가로막혔다. 율은 빨리 오라고 재촉했다. 에베레스트 등정길의 대장이라고 했었나? 이건 힘 센 대장이와 산책 나온 것 같았다. 산책이라고 하니, 율이 무려 호스를 잡고 따라오라고 했을 때, 절벽, 가파른 오르막길, 하다못해 둔턱 비슷한 것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다행히도 그런 건 없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완전히 목줄이잖아. 목줄을 매고 있는 골든 리트리버와 산책.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니 금방이라도 자고 싶어졌다.
다 꿈이겠지.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결론이였다. 옷장을 열고 비밀 공간으로 들어가는 적당한 설정의 적당한 일탈, 주인공의 나이도 올해로 딱 열 여덟으로 적당하다. ‘배고픔은 우울의 원인’ 말고도 세상에 이야기는 많으니까. 이런 이야기 하나 정도는 길바닥에 대충 버려놔도 괜찮을 것이다. 예전엔 신문 기사보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좋았다. 사실 지금도 좋아한다. 차마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이야기를 너무 많이 본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까지 해내는 거다. 그래. 그렇지. 그렇다. 그렇고 말고. 이왕 꿈을 꾼 거, 어차피 깨어날 일인 거, 끝까지 가보지 뭐. 호스를 붙들고 흐물흐물, 빨랫줄 비슷한 것에 걸린 오징어마냥 걸었다. 그러자 거짓말 같이 율과 내 앞으로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해풍, 육풍, 뭐가 밤이고 뭐가 낮이였지, 봄? 북서? 동남? 오흐츠크 해? 시베리아 북풍? 봄바람보다는 버스 난방같기도 하고. 그게 무엇인지는 중요한게 아니였다. 이대로 말라 비틀어진 건어물이 되자. 중요한 건 맛있는 것. 맛있는 건 떡볶이. 떡볶이는 따뜻해. 난방도 따뜻해. 아, 따뜻해. 죽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