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그거 암? 넌 내 자존감 충전기인듯

널 보면 내가 인생을 허투루 살고 있지 않다는 게 느껴져서

뭐래 병신이

이글턴이 조용히 말고기 버거를 까잡수다가 옆에 들러붙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가 심심해서 불러놓고 지랄부터 시작한다. 바로 본론부터 말하자면, 테리는 말만 많고 하는 건 없는 음침한 자식이다. 테리 이글턴이랑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수능 일주일 전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째고 오락실이나 다니던 사이였다. 나는 비교적 솔직한 놈팽이였던 반면, 이글턴은 거짓말밖에 할 줄 모르는 놈팽이였다. 그게 차이점이다. 그게 얘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고 등학교 때부터 나랑 같이 오락실이나 다녔으면서, 그냥 솔직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인정을 할 줄 모른다. 이러고 있는 나도 싫어하는 것 처럼 보이고, 학교는 물론이거니와, 오락실도 부정했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존나 싫어한다. 그런 걔가 일반인인 척 하는 오타쿠를 싫어하는 오타쿠가 된 건 당연한 수순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서브컬쳐 관련 레이빙 영상을 나한테 들이밀며 존나 나같다고 낄낄대고 있었다. 그거 3년도 더 된 건데. 녀석은 현재를 살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흐르고 흘러 하류에 도착하는 디지털 풍화된 영상을 보고서야 웃을 수 있다. 그야, 나는 저기 있었는데, 그리고 저 때가 처음 여는 행사라서, 진짜, 존나게, 재미있었는데. 같이 가자고 하면 내 뺄거다. 부끄럽거나, 신중하거나, 바보같거나, 걍 스스로에 대해서 너무 생각을 하거나. 자의식 과잉이든 간에, 이걸 뭐라고 이름 붙이던 간에 느껴지는 안쓰러운 구석이 있다. 진짜 문제는 이걸 입 밖에 내밀면 얘는 자기 공간으로 더 비집고 들어가리라는 거다.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테리가 나한테 쌍욕을 박는다는 것이였다. 테리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그래서 테리가 저러는 거라는 편견 아닌 편견이 있다. 테리는 나를 제외한 모든 인간들에게 의견이 없고 친절한 것 처럼 보인다. 거짓말 전문가라서 맨날 오락실이나 다니는 주제에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들한테도 평판이 좋았다. 유독 나한테 지랄맞다. 그게 그나마 다행이였다. 나한테도 안 툴툴거렸으면 얘는 진작에 죽어버렸을 거다. 아니면 화장실에서 몰래 울다가 머리를 변기에다 쾅쾅 찍어 깨먹는 차력쇼를 몇 번 더 했던가. 다행히 죽진 않았지만. 걔가 나한테도 나긋나긋하게 대했으면 역겨워서 진작 내가 테리를 죽여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얘를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지 않는 데에서 오는 문제가 있다. 얘 응석을 천년만년 받아 주는 건 피곤하다. 부모의 기분이 이런 건가, 얘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이해는 한다만... 그냥 영원히 이해만 할 뿐이다. 테리는 내가 저녁까지 일하는 걸 뻔히 알면서 8시에 굳이 굳이 날 불렀고, 역시나 본론도 없이 실없는 소리나 시비만 자꾸 걸어댈 뿐이였으며, 도대체 왜 불렀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이 시간에 집에 드러누워서 했었을 일을 매장에서 하기로 했다. 휴대폰. 사람을 앞에 두고 휴대폰이나 꺼내서 만지겠다는 소리다.

나는 공식적으로 개발 종료된 휴대폰 게임을 붙들고 있었다. 이제는 사설 서버로 운영되는데, 그 당시 상황을 내가 아는 대로만 설명하자면, 서비스 시작 기준으로 20년 전 ‘다시 돌아온’ 가상화폐 투기 붐과 함께 부품 값이 뛰어 단가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드랍되어버린 야마하 사의 가상악기 ‘보컬로이드 v11’에 수록될 예정이였던 ‘하츠네 미쿠’ 클래식 프리셋의 하청의 하청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제작되기로 할 작품이였고… 아무튼 이제는 모든 것이 예정이였고, 미쿠는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고전이였다. 아니면 사람들이 락 음악이나 힙합 음악에다 대고 그러하듯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거나.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면, 나도 사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 나는 개발이 종료된 게임을 하고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야, 저거 봐라

이번에 새로 들어온건데 진짜 웃기지 않아?

뭐래 병신이

보잭이 가리킨 곳에는 맥도나 의자가 있었다. 토끼 한 마리가 한 손에 콜라를 들고 맥도나 의자에 설치된 페달을 돌리고 있었다.

뻔한 레파토리겠지. 이거나 저거나 다 우습다고 이야기하겠지. 그리고 이게 얼마나 부조리한지도 백날 천날 이야기하겠지. 어차피 이 게임이나 저 페달 밟는 거나 비슷하다고 말하겠지. 대충 그런 이야기나 하다가 아무것도 안 하겠지. 아무것도 안 하겠지. 그냥 뭐든지 웃기게 보는 사람들. 님은 왜 이렇게 웃기는 일을 하세요? 몰라. 너는 내가 우습니? 우습구나. 내 답변은 이거다. 씨발 그래서 너는 뭘 그렇게 대단한 걸 하고 사시는데요?

하지만 그런 말에도 일리는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세상 모두가 일관성 있게 나더러 대단한 일을 좀 하라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테리가 스스로에게나 나한테나 깐깐한 건 둘째 치고, 내가 보기에도 내가 정상인 범주에 드는 건 아니였으니까. 아무튼 나는 무언가에 쉽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었다. 부모님부터가 나더러 자폐 아니냐고 했고. 물론 말만 하고 아무것도 하진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죽일 듯이 싫어하거나 분수에 맞지 않게 추켜올리거나. 보통은 종목의 문제였다. 공부나 운동 같은 거에 발동이 걸릴 때면 뭔 절박함이니 뭐니 하면서 좋아했고, 그 외의 다른 일들에 이 상태가 되면 완전히 미친 놈이라면서 싫어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이 두 가지 일에 무슨 차이점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굳이 따지자면 자기한테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한 때는 신경 다양성 같은 단어를 검색해가며 내가 가진 것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었다. 이제는 하지 않는다. 내가 이상한가? 그런데 내가 그러지 않기 위해 뭘 할 수 있고, 내가 그걸 왜 해야 하며, 애당초 네놈들 생각이랑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야,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이거, 이 게임 말야, 그게 그렇게 재밌냐?

아 자꾸 왜 시비야

아니 그러지 말고 나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린데

그러니까 중요한 건 상대적으로 미친 놈에 가까운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날 여기까지 끌고 나온 테리, 테리 이글턴 이야기다. 얘는 갑자기 나를 왜 불러세운 걸까? 얘한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고, 그냥 테리는 지금 대학원 때려치우고 나이 먹고 군대나 가게 생겼으니까 말이다. 세상한테 사기를 당했다는 감각. 다만 그걸 느끼는 시점이 너무 늦지 않았나.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얘 부모님도 알 텐데, 너는 지금 무슨 중대 발표라도 할 것 같은 진지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아 있는 건가? 이럴때마다 세상에 국가공인 정상인 자격증 NCS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딴 건 없다. 만약 그랬다면 얘가 날 화풀이용 펀칭백으로 써먹을 일도 없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