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말 다음엔 무엇이 일어날까

왜 쓰나요?

제가 엇박 909 하이햇을 좋아하듯이 턴제 전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턴제 전투를 좋아한다면 정확히 턴제 전투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좋아하는 건지 그걸 명확히 하고 싶었습니다.

뭘 쓰나요?

턴 기반 RPG들, 그 중에서도 전투 시스템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다양한 게임들을 언급하며 자주 쓰이는 특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막 합니다. 여기서 턴 기반 RPG 전투 시스템이라 함은, 턴 개념이 있고, 특정 수치를 0으로 떨궈서 캐릭터가 쓰러지는 규칙을 가지고 있는 게임을 말합니다.

세 가지의 특징들

속성놀이, 가위바위보

포켓몬 시리즈 이야기를 먼저 해 볼까 합니다.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포켓몬 시리즈는 포켓몬스터 블랙이였는데, 너무 재미가 없어서 중도에 그만뒀습니다. 포켓몬은 정석 원형 RPG에 가장 가까운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와 내가 있고, 서로의 차례마다 공격해서, 한 쪽의 HP가 0이 되면 결판이 납니다. 전투 시스템 안에서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이랄게 별로 없습니다. 포켓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육성입니다. 필드에 돌아다니는 작은 포켓몬들을 많이 잡아서, 경험치를 모아 레벨 업을 하고, 그러면 공격이 더더욱 강해져서 더 강한 포켓몬도 잡고, 그걸 레벨 100이 될 때까지 하는 거죠. 어휴. 벌써 일에 가깝습니다. 전략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라면 사전에 포켓몬들의 구성을 어떻게 짤 것이며, 무슨 아이템을 장착하고 하는 것들에 쏠려 있습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박사님 아니면 그런 비슷한 사람이 불, 물, 풀 포켓몬 세 가지 스타팅 포켓몬 중 하나를 고르게 하죠. 불은 풀 포켓몬에 강하고, 풀은 물 포켓몬에 강하고, 물은 풀 포켓몬에 강하죠. 가위바위보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속성도 다양해지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집니다. 그 선택지라 함은 더더욱 많은 속성입니다. 각각의 포켓몬은 18각 가위바위보의 선택지 중 하나로 기능합니다. 당신은 포켓몬 관장님들이 무슨 포켓몬을 가지고 있는지 여러 번 져 가면서 확인 한 다음, 그 포켓몬의 상성을 잘 따져 가며 해당하는 포켓몬을 잘 길러서 이기는 싸움을 하면 됩니다. 그게 어렵다면 이길 수 있는 포켓몬을 많이 잡아서 100레벨짜리 포켓몬을 만든 뒤 공격만 하면 됩니다. 오모리의 전투는 이 속성 시스템과 유사하지만 완전히 다른 기믹을 쓰는데, 감정입니다. 캐릭터가 가질 수 있는 분노-슬픔-즐거움, 그리고 중립 상태를 포함해서 네 가지의 감정 상태가 있습니다. 각각의 상태들은 캐릭터의 스탯을 올리거나 내리고, 이것이 일종의 가위바위보처럼 작용합니다. 특이한 점이라면 다양한 방법으로 전투 도중에 감정을 바꿀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적이 슬픔 상태에 있다면 아이템 Air Horn을 쓰거나 Kel의 도발 스킬로 아군 캐릭터들을 모두 분노 상태로 만들어 강한 공격을 할 수 있게 한다던지요. 특히 보스전에서 이 감정 가위바위보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저는 이것이 썩 마음에 듭니다. 전투 전에 무언가가 다 결정나기보다는 전투 도중에 뭔가가 일어나니까요. 포켓몬의 속성 시스템보다는 조금 더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울거나 웃거나 화내거나 할 때 귀엽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는 있습니다. 적들을 많이 잡아서 모든 캐릭터들을 50레벨로 만들어 공격만 하는 선택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어떻게든 진행을 해야 하는 어드벤처 게임에 가까우니까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포켓몬의 경우도 그렇구요. 썩 내키진 않지만, 아마도요. 아마도요.

확률놀이, 주사위 게임

외계인 침공을 막기 위해 출동한 특수부대에 속한 용병이 바로 눈 앞에 있는 외계인도 맞추지 못하는, 악명 높은 주사위 게임인 엑스컴이 확률 놀이의 가장 좋은 예시입니다. 오만 것에 확률이 붙어 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것은 다양한 요인에 따라 ‘공격을 적중시킬 확률’이 산정된다는 점입니다. 확률은 그 어떤 것 보다도 무섭고, 플레이어에게 좆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명중률이 99%라는 말은 빗맞출 확률이 1%나 된다는 소리니까요. 저는 이 기믹을 다시 생각할 때 마다 존 보이스의 꽤나 좋은 에피소드 7, WHY DO I CHOOSE THIS FOR A LIVING?이 떠오릅니다. 확률은 자비도 뭣도 없고 예상 불가능한 것은 공포의 가장 큰 전제 조건입니다. 하지만 확률은 그 악명에 걸맞는 커다란 매력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턴제 게임인 다키스트 던전도 이러한 기믹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다키스트 던전 커뮤니티에서 밈으로 회자되는 두 캐릭터입니다. 게임 내 최강의 전열 딜러-탱커를 담당하는 나병 환자의… 처참한 명중률과, 성녀와 함께 대체 불가능 힐러로 기능하는 신비학자의… 0힐 출혈 죽음의 문턱 말이죠. 고백하자면, 저는 주사위 놀이를 좋아합니다. 이 두 캐릭터가 없다면 다키스트 던전은 다키스트 던전 답지 않을 거에요. 주사위는 언제나 최악에서 최고를 만들어낼 수 있고, 그 역으로 최고에서 최악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상황은 ‘운 좋게’ 흘러갈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어그러질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 상황을 어떻게든 통제하고 조작할 수는 있습니다. 명중률 보정 장신구를 끼우고, 각 행동이 가진 위험성을 알고 큰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며, 다양한 기벽들을 조심스럽게 관리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언제나 일어날 일은 일어납니다. 다키스트 던전의 경우 특유의 어두운 이야기와 예측 불가능한 게임플레이가 맞물려 큰 시너지를 이룹니다. 모든 것은 어둡고, 예측 불가능하며, 꿈도 희망도 없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납니다.

위치놀이, 체스

턴제 전략 게임들 몇 가지를 찾아보면서, 고전 RPG에 위치 개념을 활용하려 한 시도 몇 가지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게임은 크로노 트리거 입니다. 기본적으로 너 한대 나 한대 턴제 전투이지만, 적들이 한 데 뭉쳐 있으면 회전 베기로 다수의 적을 한 번에 공격할 수 있습니다. 일직선에 있는 여러 명의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마법도 있구요. 픽셀 던전에서 전투는 너 한대 치면 나 한대 친다 식의 원형 턴제 전투입니다. 이것만 보면 굉장히 단조롭지만, 던전의 구조를 전투에 활용하는 것이 던전 탐험의 성패를 크게 좌우합니다. 셀 전투 시스템도 있습니다. 와일드 암즈 4의 ‘셀 전투’ 방식은 각 캐릭터들이 여러 개의 셀을 옮겨다니며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아군을 치유하기도 합니다. 아군이 한 셀에 뭉쳐 있으면 하나의 셀을 지정하는 것만으로도 다수의 아군을 치유할 수 있지만, 동시에 적이 그 셀을 지정했을 때 다수의 아군이 공격받기도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방식과는 차이가 있지만 당장 또 생각나는 것은 로드 오브 히어로즈의 대열 시스템이 있겠네요. 전열 두명, 후열 세명, 아니면 일직선으로 다섯 명 등… 몇 가지 방법으로 캐릭터들을 배치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드, 셀 등의 위치 시스템이 턴제 RPG에 있다면 보통은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특히 어디에 캐릭터를 배치하느냐에 따라 적의 공격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면서 일방적인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RPG 턴제 전투에서 사전 준비에서 나오는 전략이 아닌, 실제 전투의 실행에서 일어나는 전략이랄 게 있다면 대부분은 다 위치 놀이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인투 더 브리치 입니다. 인투 더 브리치의 전투는 사각형 그리드에서 이루어집니다. 플레이어는 세 개의 로봇을 가지고 거대 벌레들이 시설을 파괴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이 때 단순히 공격하는 것 보다는 벌레를 밀쳐내고 당기고 옮겨서 서로를 공격하게 하거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빠트리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또, 다키스트 던전입니다. 다키스트 던전의 확률놀이 부분만 보면 이 게임이 굉장히 불합리한 게임 같지만, 이 게임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바로 위치 시스템입니다. 다키스트 던전은 1열부터 4열까지 위치 개념이 있는 게임입니다. 전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적이 있고 후열에서 강한 공격을 할 수 있는 적이 있습니다. 각 적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고, 적의 위치를 적절하게 바꾸고, 무력화시키며 하나하나 제거하는 것이 안정적인 전투의 핵심입니다. 최근 출시된 무료 DLC인 서커스 PvP 컨텐츠는 이 기믹이 실제 게임에서 얼마나 전략적으로 작용하는지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입니다. 마치 체스처럼요.

리얼 타임 사파들과 잡다한 이야기들

내 턴 게이지

턴제 전투 게임에서 선공권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선공권을 비튼 ‘내 턴 게이지’는 턴제이면서 리얼타임인, ‘하프 타임’ 전략 게임의 핵심 메카닉입니다. 캐릭터의 속도 능력 수치가 높으면 선턴을 잡는 것이 아닌, 행동력 게이지가 속도 수치에 비례한 속도로 차오릅니다. 인투 더 브리치 개발진들의 전작인 FTL 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크로노 트리거도 내 턴 게이지를 사용합니다. 내 턴 게이지에 영향을 미치는 속도 수치를 전투 도중에 올리거나 내릴 수 있는 스킬이 있는 RPG가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했던 플래시 게임이라,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제보 받습니다) 그 게임 이후로 저에게 있어서 ‘내 턴 게이지’는 선공권을 극단적으로 부풀리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건 슬레이 더 스파이어 이하 슬더스입니다. 슬더스는 덱 빌딩에 턴제 전투를 버무린 게임인데, 게임의 재미가 턴제 전투에 있다기 보다는 시너지가 좋은 덱을 짜서, 소위 말하는 사기를 치는 쪽에 있습니다. 이 게임의 메카닉을 가장 잘 보여주면서도 가장 재미 없게 하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와쳐 캐릭터를 골라서 ‘추월-마음의 요새’ 덱을 구성해보는 것입니다. 적의 턴은 오지 않고, 혼자 덱을 섞어가면서 끝나지 않는 플레이어 턴을 붙잡고 죽을 때까지 공격, 공격, 공격하는, 그러한 원 턴 킬이 가능한 완전한 덱을 구성하는, 그런 재미입니다. 물론 ‘추월-마음의 요새’ 말고도 다양한 덱 아키타입들이 있지만, 보통 어떤 아키타입이든 마나 펌핑과 드로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플레이어의 턴을 끝없이 연장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버튼을 눌러

많은 턴제 RPG 게임이 이 방식을 사용합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페이퍼 마리오입니다. 공격을 할 때, 어떤 타이밍이 있고, 그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누르면 더 강한 공격이 나간다거나 하는 식이죠. 간단무식하고, 플레이어에게 도전할 수 있는 거리 하나를 더 줍니다. 하지만 이게 ‘턴제 전략’에 관한 특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언더테일이 과연 턴제 전략 RPG일까요? 일단 맨 위에서 제시한 분류에는 부합합니다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더테일은 슈팅 게임에 턴제 전투의 껍데기만 가져온 시스템을 사용합니다. 언더테일의 핵심 메카닉은 다양한 보스들의 탄막 패턴을 당신의 움직임으로 돌파하는 데 있습니다. 아이템 사용을 제한 공격, 관찰, 도망은 비주얼 노벨의 선택지처럼 작용합니다. 이건 분명한 리얼타임 게임이죠. 하지만 이런 게임들은 ‘진정한’ 턴제 전략 게임이 아니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스컬걸즈로 유명한 랩 제로의 플랫포머-하프타임-RPG 인디비저블입니다. 전투가 꽤나 독특합니다. 일반적인 메트로베니아-플랫폼 게임에서 적과 마주치면 전투 페이즈로 넘어가고, 그 전투 페이즈에서 네 개의 버튼이 각각의 캐릭터의 공격 버튼이 됩니다. 이 버튼을 누르면 각 캐릭터가 공격하고, 앞에서 언급한 ‘내 턴 게이지’가 가득 차면 해당하는 버튼을 눌러 공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각 캐릭터의 공격을 적절한 타이밍에 조합해서 공중 콤보 등을 넣으면 더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턴제 전략인가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격투 게임에서, 공중 콤보만 떼서 갖다 붙인 느낌입니다. 하지만 쉽고, 재미있고, 먹힙니다.

쓰러지지 않아

마더 시리즈에서는 캐릭터가 공격을 당했을 때 체력이 실시간으로, 천천히 내려갑니다. 0이 되기 전에 회복만 해 주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마더 시리즈를 직접 접해본 적은 없지만 이 시리즈에 영향을 받은 언더테일에서 유사한 기믹을 찾아 볼 수 있고 (보라색 체력 바? 이걸 뭐라고 부르는 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오모리에서는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오모리 캐릭터만 단 한번, 1의 체력을 남기고 살아남습니다. 다키스트 던전도 ‘죽음의 문턱’ 이라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치명타를 받았을 때 한 번 살려주는 시스템은, 그걸 사용할 때 기분이 꽤나 좋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일발 역전을 노려볼 수도 있고, 도무지 어찌할 수도 없는 불합리한 상황이 일어날 때 한 번의 기회를 주니까요. 또 생각나는 것으로는 ‘필살기’ 같은 게 있겠네요. 뭐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을 때 누르는 비상 단추 비슷한 것입니다. 페르소나 5의 ‘올 아웃 어택’, 오모리에도 똑같은 이름의 똑같은 그것이 있습니다. 캐릭터가 피해를 입거나 피해를 입힐 때 어떠한 게이지가 쌓이고, 그 게이지가 모두 차면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한 번의 기회로도 작용할 수 있고, 오로지 필살기 발동만을 노리고 파티를 구성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것 저것 구글링하다 찾아낸 것인데, 심지어는 이 기믹만으로 이루어진 게임도 있었습니다. 알 토네리코 2에서는 전열 두 명이 공격을 막고, 후열 두 명이 필살기 비슷한 걸 충전한 뒤에 ‘큰 한방’을 주는 전투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한 방 필살기들 또한, 기분이 좋습니다.

이런 기믹이 당신에게 원하는 것들

모든 게임이 그렇지는 않지만, 역시 턴제 전략 게임의 핵심 메카닉은 바로, 적의 행동을 예측하고, 그것을 통해 내가 뭘 할지 계획한 뒤, 좋은 계획에 대해 보상해주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 가지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레벨 1 포켓몬 6마리로 레드 공략’ 인데요… 영상 저는 이 영상을 닌텐도 DS가 한창 유행했던 시절에 봤던 것 같습니다. 더 붙일 말을 생각해 봤지만 딱히 없는 것 같구요. 재미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